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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공연

영원한 반쪽을 찾아서

by 절실한 사람 2020. 1. 3.

뮤지컬 '헤드윅' 리뷰

 

사람들은 무엇이든 편을 가르고 제멋대로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다. 당장 나도 눈 앞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옷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속이 편안하니까. 그런데 가만 보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분류 체계는 인간들이 모두 자의적으로 정하고 틀에 끼워 넣은 것들이다. 혹시 만약 먼 미래의 지구인이 역사 공부를 하다 옛날 사람들이 해놓은 분류체계를 마주하거나, 아니면 저 멀리 외계인이 어쩌다 보게 된다면 고개를 갸웃하지는 않을까?

 

조금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는 남과 여를 너무나도 당연한 성별의 한 속성으로 보고 나누지만 초등학교 시간에 배우는 지렁이나 대부분의 식물들은 암수한몸이다. (신기하게도 지렁이는 분명 암수한몸이지만 혼자서는 절대 번식활동을 하지 못한다.) 나아가서 의학에서도 염색체의 성별은 분명 여자인데 남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도 물론 있다. 그럼 그 사람은 여자일까? 아니면 남자일까? 이게 그냥 예외라고 여기고 슬쩍 넘어가려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

 

이미 인공 장기도 만들어 이식을 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자. 만약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몇십 년 정도를 산 뒤 어떤 이유로 내 목 아래를 모두 여자의 몸으로 바꾼다면, 나는 여자일까 아니면 여전히 남자일까? 아니면 나는 그냥 '나'일까?

 


 

조그만 카페 지하에서 봤던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이 생각난다. 좁은 공간에서의 한 시간 남짓한 공연이었지만, 그 어떤 공연보다 행복하고 마음이 저 끝까지 차올랐다. 그 날의 기타가 내는 숨소리와 함께 마구 쿵쾅대던 내 심장. 노래와 노래 사이 줄을 조율하는 시간에 던진 시답잖은 농담까지. 그때 처음으로 무대가 꽉 차 보였다. 무대에 오른 사람이 내는 목소리가 이렇게나 깊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 진심을 담은 사람의 목소리는 무대가 비록 좁을지라도 깊숙이 오는구나.

 

처음 볼 때는 이런 내용인지 상상도 못 했다. 그저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니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내가 알고 있던 헤드윅은 부끄럽게도, 그저 어릴 적부터 동성애자인 한 남자아이가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난 뒤 가수가 된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리고 내용과는 상관없이 노래가 꽤 괜찮더라 이 정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날 태어난 헤드윅은 20대 중반 동독으로 파견을 온 미군과 사랑에 빠진다. 결혼을 위해 불법 성전환 수술을 받고 미국에 건너오지만, 애초에 슈가 대디(=스폰서)였던 그 미군에게 곧 버림받게 된다. 아이러닉하게도 이혼한 날은 바로 장벽이 무너진 날. 근근이 불법 알바로 살아가던 헤드윅은 이번엔 베이비시터로 일하던 집의 아들 토미와 음악 활동을 하며 다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토미는 성전환 수술을 한 헤드윅의 애매한 정체성까지 사랑하기는 역부족. 도망치기만 했으면 다행이련만 토미는 이제까지 헤드윅이 작곡한 노래들을 가지고 대히트를 치는 가수가 된다.

 

헤드윅은 자신의 노래를 뺏은 토미에게 저작권료라든가 뭐 다른 걸 바라진 않는다.

 

헤드윅은 그저 어딘가에 있을, 태초에 갈라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멜뿐이다.

 

해와 달과 땅의 아이

 

 

헤드윅이 그토록 바라는 사랑은 곧 뮤지컬 '헤드윅'의 전부다. 이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노래가 바로 초반부에 애니메이션과 함께 나오는 <Origin of Love>이고. 플라톤의 <향연>을 모티브로 한 이 노래는 가만히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인간이 원래는 둘이 붙어 완벽한 구의 형체를 지닌 하나의 몸이었다가, 신의 분노로 인해 둘로 나뉘었고 그 뒤로는 원래의 반쪽을 찾기 위해 사랑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뮤지컬 헤드윅에서는 로맨틱하게 묘사가 됩니다. 하지만, 원래 플라톤이 의도한 이야기는 결코 로맨틱하지 않은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랍니다.

첫째로, 이미 나뉜 몸이 하나로 합쳐질 수 없듯이, 반쪽짜리가 되어버린 인간은 결코 완성된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형벌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고요.

둘째로, 인간이 오만 때문에 둘로 갈라지기 이전, 원시적인 상태, 즉 문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랑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출발점은 규약이나 규제(근친상간, 시신을 먹지 않는 것 같은)가 생기면서 발생했습니다. 이 사랑이야기는, 문명을 부정하고, 이런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위험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사랑의 목적을 나뉜 두 개체 간의 합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엔 가장 위험한 이야기인데, 상대방이 나와 다른 또 하나의 객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을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위험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죽여버린다는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접해봤겠죠? 바로 그 얘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를 인정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겠죠.

출처 : https://hagun.tistory.com/2775641

 

뮤지컬 헤드윅 중 '사랑의 기원'

https://youtu.be/aUkSrxWJgfY 

띵띵띵띵띵띵띵곡

 


 

홀로 경계에 선 헤드윅, 누가 감히 그녀를 욕할 수 있을까.

 

요즘 사회가 어떤 분야에서든 참 극단을 달린다 싶었는데, 뮤지컬을 보니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물음에 대해 답을 던져주는 듯했다. 헤드윅이 정말 사랑만을 보고 불법 성전환 수술까지 감행해가며 미국으로 건너온 건 아녔을 거다. 그것보다는 자유의 가치를 보고 왔겠지. 미국을 가기 위해 원래 성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헤드윅은 나중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랑을 잃고, 버림을 받는다.

 

영화 '헤드윅'에서

 

 

동독과 서독으로 대표되는 이념의 대립에 휩쓸리는 헤드윅의 모습은 애처롭다. 인류의 역사가 있는 한 무의미한 다툼들은 계속되어 왔고, 또 계속될 거다. 이념들이 서로 충돌하고 파도처럼 휩쓸고 물러갈 때마다 상처 입는 것은 오직 그 위에 선 사람들뿐이다.

 

공연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천장에 걸린 현수막이 시선을 끌었다. 헤드윅(Hedwig)이라는 글자가 공연이 끝나니 헤드윅(Head + wig=직역하면 머리 가발)으로 읽혔다. (혹시 언어유희를 노린 건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겐 저게 어떻게 보일까. 그 사람들도 나처럼 공연을 보고 혹시나 글자가 겹쳐 보였을까 싶었지만 이건 잘 모르겠다.)

 

가발은 슈가대디가 그녀를 떠나며 남긴 것인데, 그와 동시에 헤드윅에게는 평생 사랑에 대한 숙제가 주어진 셈이다. 공연 마지막에 가서야 헤드윅은 가발을 스스로 집어던진다. 그녀가 평생 쫒던 물음에 대한 해방을 얻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끝과 끝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단지 벽돌 몇 쪼가리에 나뉘어 있었지만 실은 서로 더 동떨어져 있던 생각들. 결혼을 해야만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것에서 드러나는 성별의 가치 차이 등등에 대한 굴레를 극 마지막에 가서 헤드윅은 '가발을 내던짐으로써' 모두 초월한다.

 

'헤드윅'이 좁게 보면 조금 특이하고 괴상한 사랑 이야기 일지는 몰라도 어떻게 보면 '경계'의 무의미함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평생 땅만을 기어 다닌 개미는 높이로 대변되는 3차원의 존재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개중에 올라간 길을 발견한 개미는 다른 개미들에겐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땅에 있는 개미는 아마 평생 그 개미를 보고 비웃을 것이다. 나는 누구의 삶에 대해 감히 평가할 자격이 있는가. 공감은 못해줄지언정,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는 건 어느 쪽에게나 안타까운 일이구나.

 

 

 

#대문사진 : 뮤지컬 <헤드윅> 2017년 공연 사진_ 오만석 ⓒ 쇼노트

 

#인터뷰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1959

 

원작자 · 각색자 · 감독 · 주연배우 존 카메론 미첼 인터뷰

서면으로 질문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기 며칠. 아뿔싸, 존 카메론 미첼이 ‘떠나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인터뷰에 답을 쓰고서? 아니다.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거 보고 쓰라고 그래!”라는 엄청난 말을 남기고)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를 여행을 떠났다는 거다.존 카메론 미첼은 2001년 ...

www.cine21.com

놀라운 점은, 제작자가 배우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는 거다. 2002년 인터뷰인데 마치 방금 한 듯하다.

 

#사진들은 영리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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