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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일기

기본이 기본이다

by 절실한 사람 2020. 5. 24.

늦은 밤, 혼자 침대를 뒤척이던 와중 추천 재생목록에 있던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을 봤다. 극 중에서 최고의 스펙으로 입사한 장백기는 첫날부터 상사인 강대리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등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장백기에게 주어진 업무는 엑셀 정리다. 하지만 맡겨진 엑셀 업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던 장백기는 강대리가 본인을 이유 없이 미워해 그런 업무만을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급기야는 강대리에게 날을 세운다.

 

장 : 제게 기본을 가르친다는 건 핑계일 뿐이고 그냥 저를 싫어하시는 걸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요.

 

강 : (한숨) 이건 누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당신을 판단할 만큼 당신을 알지도 못하고요. 스스로를 드러내고 돋보이고 싶은 의욕이 앞서면 조급 해지는 법이죠. 장백기 씨는 지금까지 우리 팀에서 배운 것이 없습니까. 나는 장백기 씨가 충분히 교육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교육에는 배운 것을 확인하는 시간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병원 내에서 PK실습 중인 학생은 그저 예비 의료인일 뿐, 무엇도 아직 되지 못한 상태다. 몇몇 환자보다도 의학적 지식이 모자랄 정도니 부족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 보니 교수님,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칭찬은커녕 혼나지 않으면 다행인 날들이 이어진다. (가끔 도가 지나치면 화를 넘어서 황당해하시는 교수님의 표정도 볼 수 있다ㅠㅠ)

 

학생들은 정식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임상 경험을 쌓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 주로 병원의 EMR, 즉 전자 의무기록을 중심으로 환자 증례를 공부하게 된다. EMR에는 환자가 어떤 증상을 호소하며 처음에 내원하였으며, 처음의 상태가 의사 입장에서 그리고 환자입장에서는 어떠했는지, 그래서 어떤 조치를 취했고 어떤 수치나 근거를 바탕으로 향후 무슨 치료계획을 세웠는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EMR에 줄임말이 지나치게 많이 쓰인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검사 항목 중 호흡기 증상에  c/r/s  : +/-/+라고 기입되어 있다면 무슨 뜻일까? 기침 증세(cough)와 가래(sputum)는 있고 콧물(rhinorrhea)은 없다는 말이다. 매일매일 EMR을 본 지 5주째인 지금이 돼서야 읽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니 처음에 어떠했을지는 끔찍할 정도다.

 

케이스 발표(라 쓰고 반성의 시간이라 읽는다)를 할 때 자주 코멘트를 듣는 부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EMR은 상당히 바쁜 상황에서 쓰이는 특성상 환자 정보를 충분히 담지 못해 환자를 직접 마주하는 과정이 필수 불가결한데, 예를 들면 당시 응급실 초진 의사가 미처 당뇨병력을 기입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가서 문진을 하면 당뇨가 있음이 확인되는 식이다. 당뇨병력이 있는 것을 알아내서 칭찬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이미 교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당뇨가 있다면 현재 공복혈당과 같은 수치를 바탕으로, 합병증을 비롯해서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식이조절, 약제 사용과 같이 어떤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는지까지 언급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혈청 크레아티닌(흔히 말하는 신장수치)의 참고치는 0.7~1.2mg/dL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치일 뿐이라서 절대적인 신장기능의 지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크레아티닌은 근육에서 유리되어 신장으로 배설되는 단백질의 일종이라 간접적인 방법으로 신장의 상태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인의 경우, 절대적인 근육량 또한 감소하기 때문에 크레아티닌 수치가 줄어들어 신장기능이 개선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노인에서는 Cystatin C라는 지표를 활용한다) 그래서 환자 보고를 할 때 환자의 크레아티닌 수치가 1.8인 것을 보고 "정상치보다 약간 높은 1.8입니다."라는 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수치는 항상 내 의견은 빼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만약 비교한다면 전날과 비교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똑같은 풍경을 봐도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감상이 다르다. 그렇지만 의무기록 상의 신체진찰 소견은 지구상 어떤 의사가 보더라도 납득이 될 정도로 객관적이어야 한다. '눈'을 예시로 하자면,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정상'이라고 기록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래서 기록상에는 '황달 소견 없음, 빈혈 소견 없음, 대광 반사에 양쪽 모두 동일하게 반응, 각막 혼탁 없음'으로 남겨진다. 의무기록은 이런 객관성 때문에 법적인 효력까지 발휘할 수 있으며, 의료기관은 이런 기록들을 관리하고 기록할 의무를 가진다.

 

기본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비록 일주일도 되지 않아 깨닫게 되었지만, 미생의 장백기가 그랬듯 나 역시 말만 하면 주위에서 쏟아지는 피드백에 오해 아닌 오해를 한 적이 있다. 글을 먼저 배워야 비로소 대화가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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