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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그래, 한국영화는 이거지

by 절실한 사람 2020. 1. 3.

영화 '엑시트' 리뷰

 

 

리뷰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고민했지만 정말 잘 봤다!

 

본가에서 내 방은 현관문 바로 앞이다. 방학 때만 와서 자긴 하지만 밤에 잠자기가 어렵다. 대한민국 대학생답게 방학 중 내 수면 사이클은 새벽 2~3시에서 아침 10시쯔음에 맞춰져 있는데,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출근하는 시각은 내 기준에서 한밤중이다. 눈을 감고 누워서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출근 전에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바쁜지 알 수 있다. (일찍 자면 되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아직은.)

 

영화 '엑시트'의 첫인상은 아주 좋지 않았다. 대체 왜 그리고 언제 광고 수신에 동의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이모티콘의 노예가 되었던 것 같다. 카카오 이모티콘은 버틸 수가 없다.) 아침 8시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알림음이 울려 본 영화 광고 카톡은, 뭔가 촌스러워 보이는 포스터는 둘째치고 일단 기분이 나빴다. '아니 예매율 1위에 흥행 폭발하면 왜 나한테 광고 카톡을 하필 지금 보내는 거지?', '저렇게 광고 카톡을 보내면 효과가 얼마나 있지?' 등등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며 잠을 방해했다. 그렇게 '엑시트'는 개봉 첫날부터 나한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지금 보니까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출구 없는 반응은 대체 무슨 반응일까?

 

 

그러던 와중, 사랑하는 누나가 나에게 본인은 오늘은 시간이 없는데 하필 가지고 있던 영화 쿠폰의 유효기간이 오늘까지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게도 어느새 영화를 고르고 있었고 두 가지 선택 가운데서 깊이 생각했다. 영화 두 개 사이에서 고민했냐고? 아니다. '다 재미없어 보이는데 굳이 보아야 할까'와 '그래도 시도라도 해볼까' 사이에서.

 

영화관 불이 꺼지기 전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영화는 괜찮았다. 기자와 평론가들은 대체 기준을 무엇으로 별점을 주었나 싶을 정도였다. 매 장면은 본능을 자극했고 지루하지 않았다. 엔딩뿐만 아니라 전개 역시 진부하지 않았다. 단지 고난과 역경을 함께 이겨낸 남녀 간의 키스로 영화가 끝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영화는 알고 보면 볼수록 매력이 가득하다. '엑시트'는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7)의 조감독 출신인 이상근 감독의 첫 번째 상업영화 데뷔작이며 이상근 감독은 2019년 1월에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가 있다. 영화는 아래 말을 충실히 따른다.

 

장르의 틀 안에서 새로움을 끊임없이 찾아내 보여주는 감독이 되고 싶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싫다. 뭐 비슷한 정도로 자본을 끌어올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제작비와 들인 시간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얼마 전 파트 2를 끝낸 아스달 연대기에서 CG 작업을 맡았던 덱스터 스튜디오에서, 일반 영화와 비교하면 18회 분량의 드라마는 작업량이 6배가량 차이가 났으며 시간이 다소 부족해 아쉬움이 남는다고도 했다. CG는 그렇다 치고, 고증 수준이나 스토리의 이해도는 어떤가? 미리 용어나 주요 인물, 세계관을 쿠키영상이라는 이름 아래 방송하기까지 한 것은 회당 제작비가 25~30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수준이다.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는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욕설이 나온다. 눈을 꼭 감고 앞(장래)이 캄캄하다는 농담을 하는 친구에게 "눈을 떠, 우리 X밥 개쓰레기야!"라고 하는 용남(조정석)은 집 앞 맥주집을 가면 왠지 구석에 앉아 있을 것만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밥먹듯이 듣고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내 또래 청춘의 분신이라 생각하니 더욱더 와 닿는다. 공감은 몰입에 있어 가장 좋은 재료다.

 

영화에선 미처 보지 못했던 글도 있다.  "마음으로 스스로를 믿고 전진하세요"

 

 

'엑시트'에서는 유독가스가 하얀색이다. 영화를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다. 유독가스는 무색무취로 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1995년 도쿄 지하철에서 일어났던 옴진리교 가스 살포 사건에서 쓰인 '사린가스'는 일단 기화하면 냄새도 없고 휘발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색이 하얀색인 가장 큰 이유는 이상근 감독이 이미 밝혔다.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CG 작업을 많이 했겠지만 티가 크게 나지 않는다. 필요한 곳은 꼼꼼히 하고, 자신 없는 부분은 정말 색깔로 가린 흔적이 보인다. 제작비가 괜히 100억이 아니다.

 

쓸데없는 것은 넣지 않았다. 어쭙잖게 설명하기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없애는 편을 택했다. 하필이면 조정석이 어떻게 등산동아리 에이스였는지 설명을 원한다면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의문이 들 시간 또한 영화는 기다리지 않는다. 103분이라는 요즘 영화 치고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몰입시킨다. 몰입은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다.

 

스크린은 주로 용남(조정석)과 의주(윤아)를 비춘다.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 달리고, 매달리고, 뛰어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설정은 마치 현대 사회에서의 사람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옥상에서 가족들을 모두 태운 뒤 서로에게 양보하는 장면에서 의주(윤아)는 말한다. " 난 여기 구름 정원의 부점장이라고." 듣는 순간은 피식했지만 영화가 끝나갈수록 저 말이 맴돌았다. 필요 이상으로 책임감 있는 모습은 우리네 사람들의 초상이다. 내가 자는 동안 현관을 열고 나갔던 가족들, 그리고 거리의 수많은 엄마와 아빠들의.

 

일단 눈에 띄어야 뭐라도 되는 현실을 풍자한 건 아닐까

 

 

마케팅에는 아쉬움이 든다. 왜 '재난' 영화에 초점을 맞춘 걸까. 글쎄다. 내 생각에 이상근 감독은 재난보다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는 힘들면 쉬어도 된다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너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고, 잘하고 있다고. 마지막 엔딩 곡은 이승환의 '슈퍼히어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슈퍼히어로'를 삽입하고 싶어서 시나리오상에 기재해뒀다고 한다. 가사가 마치 <엑시트>를 위해 만든 것처럼 딱 떨어지게 영화와 어울리고 주제도 잘 표현한다고도 하니 잠깐 보고 가자. (영화의 원래 제목도 ‘슈퍼히어로’였다고 한다. 제목을 바꾼 게 흥행 면에서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뭔가 아쉽다.)

 

누구에게나 그들만의 기회가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들

너희들 모두 특별해 이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어

이 순간부터 넌 세상의 중심이야

그대는 Super Hero

 

본능을 자극하는 스토리. 과하지 않은 감성 자극.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연기와 103분의 적정한 러닝타임. 앞으로가 기대되는 이상근 감독의 데뷔작 '엑시트'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으며 영리적 목적이 아님을 밝힙니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558132

 

죽는 장면 뺀 재난영화... '엑시트' 감독의 이유 있는 고민

[인터뷰] 영화 <엑시트> 이상근 감독

star.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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